3.1운동과 유관순열사
3.1운동과 유관순 열사
◎ 3.1운동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11.11)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윌슨이 제안한 14개조
의 전후처리 원칙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내,외 조선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서 희망의 불씨가 생겨나고 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한반도와 전세계각지의 조선밀집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
하게 된다.
이는 일본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다.
3.1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3.1혁명, 3.1독립만세 운동, 기미독립운동으로 칭하기도 하며 작년 2019년 3월 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 유관순 열사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의 3남2녀중 차녀로 태어났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그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위험하니 참가하지 말라는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을 뛰어넘어 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때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데 이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이라하며
이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의 앞잡이인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게 된다.
이 와중 그녀의 부모는 일본경찰에게 살해당하고 그녀 자신도 5년형을 구형받았다.
그녀는 수감생활중 대한민국독립만세를 외치다 모진고문으로 결국 1920년 9월 28일 사망하고 만다.
유관순이 업적대비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과 함께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써 국민통합과 국민의 애국심 고향에 큰 기여를 하고 대한민국의 기조를 공고히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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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고종의 선택
1. 아관파천이란
1896년 2월 11일 ~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여간 고종과 세자 순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거처한 사건.
2. 배경
1895년의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세력에 의해 신변의 위협 느끼고 당시 일본과 대립중이며, 자신이 원하는 전제적 군주제를 행사하고 있던 러시아의 힘을 빌리고자 심야에 러시아 군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는 당시 을미사변 후 친일파 김홍집내각이 내놓은 을미개혁 안 중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김홍집내각과 일본군대가 지방으로 내려가있는 틈을 타 이범진 등의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치밀히 사전에 계획한 일이었다.
3.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날 고종은 단발령을 폐지하고 내각총리 대신 김홍집을 비롯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등의 친일파 세력의 체포 및 면직을 명했고 성난 군중에 의해 일부는 살해되거나 망명했다.
이 사건이후 일본군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찾아가 고종의 환궁을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러.일전쟁에서 전승하고 다시 경복궁을 점거할때까지 조선에서 그 영향력을 상당히 잃게 된다.
당연한 수순으로 조선은 러시아의 영향권안에 들어가고 러시아는 경원군, 경선군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을 요구하는 등 많은 이권을 요구했다. 여기서 문제는 다른 국과들과 체결해놓은 '최혜국대우조항'때문에 러시아에 하나를 내놓으면 다른 나라들에도 자동으로 하나씩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 일본과 가까워진 러시아의 야욕은 한반도에서 만주로 옮겨가고, 여기에 독립협회와 군중들의 고종에 대한 환궁 청원요청까지 더해져 2월 20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는 '광무'로 바꿔 황제즉위식을 치르고 조선이 독립제국임을 선포한다.
4. 아관파천의 의의
한 나라의 국왕으로써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했다는 점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는 부끄러운 행동이며 아관파천이 조선식민지화를 불러왔다는 등 여러가지 논란이 많습니다. 하지만 을미사변으로 한 나라의 왕비까지 죽인 일본으로써는 더이상 조선에 대해 거리낄것이 없었고 아관파천이전부터 이미 고종의 목숨도 조선의 미래도 일본에 손바닥 위에 놓여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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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배경과 의의
◎을미사변(1895.10.8)
: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친일파와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으로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1.배경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손에 얻게 된다.
그러나 이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여들여 일본에 요동반도 반환을 요청하고, 일본은 울며겨자먹기로 이를 반환한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중전 민씨는 러시아를 통한 일본견제를 꿈꾸며 김윤식등의 친일파를 축출하고, 이완용을 주축으로 한 친러파를 중용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과 함께 '인아거일'[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외교정책을 추진한다.
(*아라사 : 러시아의 한자식 표현)
조선 조정의 이러한 급변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조선을 러시아에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중전 민씨 살해를 계획하게 된다.
당시 조선 조정은 민씨와 민씨일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왕후를 죽이면 이들의 세력이 자연히 약화되고 그 후 친일파들을 앞세워 조선식민화를 앞당기려 한것이다.
2.전개
중전 민씨를 시해하기 위해 새로운 조선 주재 일본공사로 미우라 고로가 부임한다.
그는 고종과 중전 민씨에게 상당히 고가의 선물을 바치고 조선왕실의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등 앞에서는 그들의 경계심을 풀기위해 여러 공작을 펼치면서 뒤로는 일본공사 지하실에서 민황후 암살계획을 세워나갔다.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일본군인이 아닌 일본의 민간인과 교토대 출신 극우 엘리트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낭인과 곧 해산될 예정이었던 대한제국군이었다.
이는 추후 국제적 명분 등을 생각하여 일본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발뺌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흥선대원군 입궁을 시작으로 낭인들은 중전 민씨의 침천까지 침입하여 많은 궁녀들과 그녀를 죽이고 그 시신을 불에 태웠다.
3. 사건 이후
다음날 일본은 친일신문인 '한성신보'를 통해 전날 홍선대원군의 입궁을 대문짝만하게 싣고 일련의 사건들을 흥선대원군과 중전민씨의 알력으로 유도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을 협박하여 친일중심인 김홍집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김홍집내각에서 실시한 단발령 등의 을미개혁으로 전국의 유생들이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 물러준 신체를 훼손하는 것'이라 반발하며 일어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전국적인 반대 투쟁으로 김홍집 내각은 휘청거리고 이런상황에서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는 등 여러가지로 정국이 불안정해진다.
4.의의
을미사변으로 인해 친러세력들이 숙청되고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이 형성된다. 또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을 계기로 외세의 경제적 수탈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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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배경과 전개과정
1. 임진왜란(1592-1598)
: 선조재위기간(1567-1608), 1592년(선조25년)~1598년 2차례에 일어나 난으로 '임진'년에 '왜'군이 벌인 '난'이라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부른다.
(1)임진왜란의 배경
*조선 - 선조재위 기간(1567~1608)으로 선조 즉위 후 중용한 사림세력이 여러 세력으로 갈리면서 점차 붕당정치로 발전하게 된다. 혼란스런 정치상황 중 일본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의견이 달라 결국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일본 - 몇백년간 혼란스러운 일본의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불안정한 지방세력을 모으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명나라 침략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길을 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조선이 이를 무시하자 조선을 침공한다.
2.임진왜란의 전개과정(주요전투)
▶충주탄금대 전투(1592.4 / 신립) : 일본군과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에서 벌인 전투로 탄금대에서 신립이 죽고 결국 패했으나, 임진왜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야전으로 그 의미가 크다.
▶한산도 대첩(1592.7 / 이순신) : 5~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일본의 사천,당포,당항포,율포로 이어지는 육군 수송 부대와 수군을 상대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가 주축이 되어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토벌해 승리를 이끈 전투.
▶진주성 싸움(1592.10 / 김시민) :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차례의 전투로 진주대첩이라고도 불리며 1차는 잘막아냈으나 2차에서 전멸당하고 만다.
▶평양성 탈환전투(1593.1 / 조명연합군)
▶행주대첩(1593.2 / 권율) : 한산도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로 민간인들 ,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수도를 수복하며 승리를 이루게 된다.
▶명량대첩(1597.9 / 이순신) : 세계 해전 사상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대역전승으로,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12척의 배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지휘로 대승을 거두게 된다.
▶노량해전(1597.11 / 이순신) :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순신이 전사한 전투로 결국 대승을 거둔다.
3.임진왜란의 결과
전쟁에서 승리를 이룬 조선이지만 자국내에서의 치열한 전투로 문화적으로는 왕궁.관청 건물들과 홍문관,충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는 많은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당했으며, 봉건집권 체제붕괴의 시발점이 된다. 또한 명나라의 전쟁으로인한 재정압박은 조선에 더 많은 징세를 거둬들이게 하였으며 이로인해 농민봉기등 지방군벌들의 잇따른 반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으로 대승을 거둔 조선이지만 이처럼 정치적,문화적,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4.임진왜란의 의의
임진왜란 종전 후 전쟁으로 인해 만연한 질병으로 동의보감이 편찬되고, 전 국민이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며 실학이 발달하게 된다. 또한 몽고와의 항쟁 이후 가장 큰 국난을 극복하여 민족의 생존과 문화를 보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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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배경과 의의
1. 갑신정변의 배경(1884)
신식군대(별기군)와 구식군대의 차별대우로인한 구식군대의 반란으로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청 : 조선내 청군대 주둔, 재정.외교고문 파견해 재정간섭,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을 맺어 상권,경제권 침략.
▶일본 : 군란시 일본공사관 침입을 빌미로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경비병 주둔 및 막대한 배상금 요구 등.
위와 같이 임오군란으로 정치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파국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청나라에 대한 입장차이로 황후 민씨 및 온건개화파와 청나라의 간섭심화에 거부감을 느낀 급진개화파간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온건개화파[김홍집] : 치열한 국제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차근차근 근대화를 밟아나갈 것을 주장.
▶급진개화파[김옥균] : 자주적인 조선의 근대화 추진을 위해서는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청의 정치적 간섭으로 부터 벗어날 것을 주장.
이 같은 상황에서 민씨일족과 온건개화파로 인해 급진개화파의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개화정책 추진에 드는 비용마련에 대해 민씨일족과 청의 고문인 묄렌도르프는 화폐를 많이 찍어내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급진개화파는 흥선대원군때 경복궁 증건을 위해 발행했던 당백전의 폐해를 주장, 이를 반대하며 일본에 차관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고종은 급진개화파에 조금더 우호적이었던 만큼 일본차관을 승낙을하고 김옥균이 일본에 요청하였으나 일본의 거절로 차관은 불발되고 급진개혁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된다. 급진개혁파의 입지가 좁아진 틈을 타 온건개혁파는 병권을 갖고 있는 지위에서 이들을 쫓아내려 시도한다.
한편 이때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청은 조선내 주둔해있던 청의 군대 3000명중 절반을 급히 베트남으로 파병시키게 되는데 이기회를 틈타 일본은 급진개화파에 군대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믿고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2. 갑신정변의 전개
1884년 급진개화파는 우정국(지금의 우체국)개국 축하연에서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을 일으켜 고위관직을 없애는 등 새로운 정부를 만들기 위해 정강 14조를 발표하고 여러 곳에 새로이 인사를 파견하는 등 개혁에 성공한 듯 했으나 3일째에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궁궐에 들이닥친 청나라 군대에 의해 고종을 호위하던 일본군이 사전약속을 어기고 도망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 홍영식 등의 개화파는 처형당하게 된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정강 14조
1. 청에 잡혀 간 흥성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진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 있는 자만을 등용한다.
5. 전후 간사한 관리와 탐관오리 가운데 현저한 자를 처벌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형한다.
12. 모든 재정을 호조에서 통할한다.
14. 정부 6조 외에 불필요한 관청을 폐지하고 대신과 참관으로 하여금 이것을 심의 처리하도록 한다.
3. 갑신정변의 의의
갑신정변은 이후 개화라는 인식을 부정적으로 바꿔버릴 정도로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반역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또한 자주적 자립이 아닌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적이었다는 점과 당시 조선의 뿌리깊은 성리학 왕조 국가이념과 일본을 매우 싫어했던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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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의 배경과 결과
1. 임오군란의 배경(1882년6월9일 , 고종19년)
1876년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이자 첫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강제적 문호개방을 하게 된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발전된 모습에 놀란 정부의 급격한 개화정책 추진과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 일본상인의 침투로 인한 양곡유출에 따른 농촌경제의 파탄으로 조선내부에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간의 갈등이 급격히 심화된다.
▶개화파 : 서양의 근대화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 추구.
→온건개화파(김홍집,김윤식) : 조선의 법과 제도유지, 서양의 과학기술만 받아들일 것을 주장.
→급진개화파(김옥균,박영효) :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서구의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까지 적극적 도입 주장.
▶위정척사파(최익현, 홍선대원군) : 바른 것(조선의 전통적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다른 나라의 것)은 피함. 서양열강세력 배척주장.
또한 중전 민씨와 민씨 일파의 부정부패, 권력전횡으로 어지러운상황에서 일본의 군대를 모방한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창설이후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대우로 군란까지 발생하게 된다.
2. 임오군란의 진행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군대의 차별대우로 인해 불만이 가득했던 구식군대는 13개월만에 급료를 받지만 중간에서 관료들이 쌀을 빼돌리거나 그나마 받은 쌀도 모래와 겨가 잔뜩 섞이거나 물에 불려 무게를 늘려놓은 것으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구식군대는 군란을 일으키게 된다. 일본의 공사관을 습격하고 민씨정권의 고관과 왕족을 습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중들이 합세하여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된다. 이에 놀란 민씨정권의 요청으로인한 청군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이 군란의 책임자로 청에 압송되면서 군란은 수습되었다.
3. 임오군란의 결과
군란은 수습되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또한 청은 재정(마젠창),외교(묄렌도르프) 고문을 각 조선에 파견하여 내정간섭까지 하게 되고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조선의 경제까지 침투한다.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의 조항
*제 1조 : 앞으로 북양대신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견된 상무위원은 개항한 조선의 항구에 주재하면서 전적으로 본국의 상인을 돌본다. 해원과 조선관원이 내왕할 때에는 다같이 평등한 예로 우대한다.
*제 2조 : 청나라 상인이 조선 항구에서 만일 개별적으로 고소를 제기할 일이 있을 경우 청나라 상무위원에게 넘겨 심의 판결한다. 이 밖에 재산문제에 관한 범죄 사건에 조선인민이 원고가 되고 청나라 인민이 피고일 때에는 청나라 상무위원이 체포하여 심의 판결하고, 청나라 인민이 원고가 되고 조선 인민이 피고일 때에는 조선관원이 피고인의 범죄행위를 청나라 상무위원과 협의하고 법률에 따라 심의하여 판결한다. 조선상인이 개항한 청나라 항구에서 범한 일체의 재산에 관한 범죄 등 사건에 있어서는 피고와 원고가 어느 나라 인민이든 모두 청나라 지방관이 법률에 따라 심의하여 판결한다.
*제 4조 : 양국 상인이 피차 개항한 항구에서 무역을 할 때에 법을 제대로 준수한다면 땅을 세내고 방을 세내어 집을 지을 수 있게 허가한다. 토산물과 금지 하지 않는 물건은 모두 교역을 허가한다.
이하 총 8조에 걸친 조약으로 이 내용만 봐도 청나라 속국 취급으로써 1조는 조선과 중국의 북양대신을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2조는 치외법권 조항, 4조는 청나라 상인의 양화진과 한성 영업소 개설과 상행위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일본은 군란에서 일본공사관 침입을 빌미로 일본경비병 주둔을 허용케 하고 막대한 배상금지불을 요구하였으며 사후 처리를 위해 불평등조약인 제물포 조약까지 체결하게 된다.
▶제물포 조약
*1항 : 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하여 조선은 흉도를 체포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2항 : 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를 지낼 것.
*3항 : 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하여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 지급할 것.
*4항 : 흉도의 폭거로 인하여 일본국이 받은 손해 그리고 고사를 호위한 육.해군의 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되, 매년 10만원씩 5년에 걸쳐 완납 청산할 것.
*5항 :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두며, 비용은 조선이 내고, 일본 공사가 경비를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 시 철병해도 무관하다.
*6항 : 조선국은 일본에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이는 조선의 자주적인 사법권을 무시한 불평등 조약으로써 안그래도 재정난에 허덕이던 조선을 더욱 골머리를 앓았으며 기존 주둔하고 있던 청군과의 충돌로 더욱 어지러워 진다.
3. 임오군란의 의의
개항후 조선 민중이 외세의 침탈과 개화정책에 대하여 전개한 최초의 투쟁으로써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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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의 배경과 결과
1.강화도 조약(1876년 2월 27일)의 배경
1868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루고 조선에 외교관계복구 요청 서계를 보낸다.하지만 종전과 다른 외교문서 형식과 문서속의 황(천하를 통일한 왕), 칙(황제의 명령) 등의 표현은 사대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배경으로써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를 거절한다.
이에 분개한 일본은 당시 일본내부의 사회문제(사민평등, 단발령등으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음)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는 등 강화도에서 만행을 저지른다.
(정한론 : 1870년대, 일본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조선에 대한 공략론)
2.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조선 부산해역에 접근.
→ 일본함장 이노우에가 '조선과의 상호통상위해 방문 및 조선해안 탐사 목적'이라고 주장함.
→ 일본 군함 운요호가 서해의 강화도까지 침입, 강화도 해안에 내림.
→ 일본군을 발견한 조선군의 경고사격.
→ 일본군들이 운요호함으로 돌아가 함포발사,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임.
→ 일본군, 영종도 상륙, 근대식 무기로 조선 수군과 무고한 현지 주민들까지 무차별 학살.
운요호 사건을 통해 일본은 조선침략의 꿈을 꾸었으나 당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사대관계로서 청이 천자국, 조선이 제후국이었다.이대로 조선을 침략하면 청이 나설 가능성이 크므로 일본은 모리공사를 청에 파견하여 '조선은 청의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일체 조선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는다.
당시 청은 영국, 프랑스,러시아와 마찰로 일본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던 청은 일본과 조약을 맺기를 종용하는 서신을 조선에 보낸다. 위와 같이 청과 교섭이 끝난 일본은 군함3척 부산항으로 끌고과 기선제압을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고 강화도로 향하고 긴장한 조선은 강화도에서 정식회담을 열게 된다.
세번에 걸친 회의끝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지지하던 위정척사파와 개방을 주징하는 개화세력(이규경,최한기,박규수,유흥기,오경석)의 대립에서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사에 따라 결국 개국을 결정하게 된다.
3.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 의 내용
◎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제2관 일본국 정부는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떄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 제3관 이후 양국간에 오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을 별도로 구비한다.조선은 한문을 쓴다.
◎ 제4관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살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한다.
◎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조선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 심리하여 판결한다.
이하 총 12관의 조약으로 구성되어있다.
일본은 제 1관을 통해 조선이 자주국가라고 내세우며 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였고 4,5관을 통해서 부산 이외의 항구를 2개 더 열도록하였다.
마침내 개항한 항구는 인천과 원산으로 인천은 한성과 가까웠고 원산은 러시아 견제용이었다. 또한 위에는 생략했으나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제7관은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하도록 허락한 내용이며 10관 또한 치외법권을 주장함으로써 불평등조약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4. 부록과 무역규칙
강화도 조약을 맺은지 7개월 후 일본은 부록과 추가조항을 통해 세부적인 내용을 확정한다.
◎ 제2관 사신 및 관리관이 발송하는 공문,서신 등 우편을 통한 비용은 사후에 변상한다. 인민을 고용하여 보낼때에는 각각 그 편의에 따른 다.
◎ 제4관 이후 부산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부두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로정한다. 동래부 중의 한 곳에 있어서는 특별히 이 이정안에서 오갈 수 있다. 일본국 인민은 마음대로 통행하며 조선 토산물과 일본국 물품을 사고 팔수 있다.
◎ 제7관 일본국 인민은 본국의 현행 여러 화폐로 조선국 인민이 소유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으며,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화 폐로 일본국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상품을 살 수 있다.
이하 총 11관의 내용으로 부록을 통해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설정되었으며 일본화폐의 사용도 허가된것을 알 수 있다.
5. 강화도 조약의 의의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비록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맺은 조약이나 흥선대원군까지 지켜오던 쇄국정책을버리고 개방을 하게 된 계기이다. 그러나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기때문에 이후 조선에 들어오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 또한 일본과 같은 지위를 얻기를 원했기때문에 그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게된다. 이 모든것들이 조선왕조 몰락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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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6.25전쟁(한국전쟁/Korean war)
1910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우리 민족은 여러 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두며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합니다. 그 결과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해방을 하게 되지만 오로지 우리민족의 힘만으로 얻어낸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대가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고자 한반도에서 세력다툼을 벌입니다. 이념의 차이로 북한은 소련, 남한은 미국의 간섭을 받아 남,북으로 갈라지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도 같은 민족으로써 하나된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던 남한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결국은 남.북 각각 독립된 정부를 세우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고 소련군 또한 북한에서 철수했지만 한반도의 긴장상태는 여전했습니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으며 시시탐탐 남한의 공산화를 위해 침범할 기회를 노리며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범한 시기가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직후라 남침의 원인을 '애치슨 라인' 에 있다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중국과 소련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태평양 방위선으로 얄류산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발표합니다. 이는 곳 애치슨라인에서 빠진 한국과 타이완의 군사적 공격에 대한 안보를 미국이 보장해주지 않는 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6.25전쟁의 발발원인으로 들기도 합니다.
6.25전쟁의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을 넘어 북한은 남한을 침범했습니다. 북한의 갑작스런 공격에 남한의 치열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3일만에 서울을 정복당합니다. 부산까지 내려온 북한에 국군은 부산을 임시수도로 지정, 국제 연합군과 함께 낙동강 일대를 최후 저지선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맥아더장군이 이끄는 국제연합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됩니다.
-한국을 지원한 63개 유엔 회원국
- 군사지원국(16개국) 미국,영국,캐나다,터키,호주,필리핀,타이,네덜란드,콜롬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룩셈부르크,에티오피아,그리스,벨기에
- 의료지원국(5개국) 스웨덴,이탈리아,덴마크,노르웨이,인도
- 기타 물자,재정 지원(39개국), 지원의사표명국(3개국)
연합국과 국군의 압록강 이북까지 북진으로 전세가 역전되나 했으나 26만이라는 압도적인 중국군의 투입으로 다시 전세가 바뀌고 연합군과 국군은 흥남 부두를 통해 해상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때 다수의 북한 주민들이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결국 계속되는 후퇴로 196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한채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한강이남까지 밀려난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으로 현재의 휴전선까지 다시 올라왔으나 대한민국의 반대에도 불구 북한국, 중국군, 연합군끼리의 휴전협정을 맺게 되고 현재의 휴전선에서 남북 군사분계선이 되었습니다.
6.25전쟁의 결과
1여년간에 걸친 남.북간 전쟁의 결과는 엄청난 인명피해는 두말할 필요도 없고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힙니다. 또한 6.25전쟁을 끝으로 남북간분단이 고착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미주의와 반공주의에 대한 증오와 반감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분단은 피를 나눈 부모자식형제 사이를 평생동안 찢어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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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19 혁명의 배경
1960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은 떄, 민주화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국토는 황폐해지고 당장 먹고 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민주주의에 열광한
데는 언론의 영향이 컸다.
당시 최대 지식인 계층이 속해 있던 1950년대의 언론은 친정부적인 서울신문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외 각 언론사들은 칼럼,사설,논설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려 했다.
이에 자유를 던져버린 이승만정권의 날조 및 공작행위,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등 언론탄압은 나날이 심해졌고 민중들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반감 역시 점점 높아져만 갔다.
국가 총 예산안의 10.5%가 교육관련 지출일 정도로 당시 사회의 교육열은 요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붐'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할 수있다는 기대감으로 빈민층에서 교육열이 더 높았고, 국민학교의 의무교육화도 이때 채택되었다.
정부의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학생수는 3배로 증가했으며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일괄적으로 포함되었다.
또한 이 시기 대학생들의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비슷한 소득 수준의 나라들과 비교했을때도 제3세계국가들에 비해 아주 높은 비율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최우선 목표가 문맹퇴치였기에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내 한국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에 이승만 지지자들은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없었고 미국의 원조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이시대의 대학생과 다른 점은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 '배운사람'은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이 모든 것들을 종합했을때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고취는 당연한 결과라고 봐야하겠다.
2. 혁명의 시작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보통 5월에 선거가 치뤄지므로 무려 10-11개월이나 이른 후보지명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총력전을 펼치라는 뜻이었다.
7월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인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하고,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만 남은 상황에서 이승만
은 조병옥이 병중인 걸 알면서도 농번기에 선거를 해서는 안된다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끝까지 조기선거를 주장했다.
야당과 여론의 비열한 짓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당이 선거에 총력전을 벌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러한 수를 쓴 것이다.
끝끝내 이승만의 뜻대로 3월 15일 조기 선거가 결정 되었다.
3. 2월 28일, 대구 학생운동
2월 28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유세일은 학생들의 유세장 출입을 막기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킨다.
이에 대구 경북고 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대구 여러개 고등학교들도 합세하여 시위하였으나 이승만정부는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일축,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
그러나 2.28 학생민주화의거는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4.19혁명의 첫 시발점으로써의 의의가 있다.
4. 3.15, 제 1차 마산의거
3월 15일 결국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난다.
특히 마산의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는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로 투표함이 엎어지자 그 투표함 속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된
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관계없이 투표함을 엎었다는 이유로 민주당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인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경찰서로 끌려간다.
도의원인 정남규는 쉽게 풀려났으나 그 길로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 민주당원들과 논의후 투표포기를 선언하고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무효
를 주장, 민주당원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며 시내 곳곳에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모여들었고 그 인원이 만여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현장진입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 온 마산시내가 정전사태로 캄캄해지자 경찰이 무차별 총기를 난사
하고 8명 사망 ,8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당시 많은 여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로 일어난 시위였다고 변명하며 해당 책임자들
의 사임또는 교체로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민주당은 3.15선거 무효를 선언한다.
5.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한편 3.15마산의거 이후 험악하던 마산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 입학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왔던 상고생 김주열군이 행방불명되었다 4월 11일 신포동 부둣가에서 떠오른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시위에 참석한 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경찰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 바다에 내다 버려진것이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 했으나 이미 소문은 삽시간에 시내로 퍼졌고 마산시내 고등학생들이 시내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반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커진 시위대는 마산시청으로 난입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또 다시 두명의 시민이 사망하게 된다.
6. 4.19혁명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그 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때의 시위는 그동안 미미했던 대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4월 18일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에서 고려대생이 피습당하고 4월 19일 오전 서울 대광
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 그 소식을 들은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게 된다.
정부는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에 합세, 이에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 공포탄
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한다. 이 날 하루 서울의 총 사망자수는 104명, 그 외 지역에서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서울 지역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 곧 서울,부산,광주,대전,대구,전주,청주,수원일대에도 계엄령을 선포하였
다.
헌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다르게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기는 커녕 우호적이었다.
아마 군부 내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위대는 점점 압박해오는 경찰과 계엄군의 진압으로 고려대학교 교정까지 몰리고 최후의 저항을 하던중 계엄군의 사단중 조재미 준장이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 즐비하게 놓인 태극기로 덮힌 희생자들 앞에 조의를 표했다.
이에 시위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7. 교수들의 시국선언, 이승만 하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미국정부마저 이승만정권에 등을 돌리게 도고 얼마안되 국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이기붕 부통령 또한 당선 사퇴 고려를 발표하고, 그 다음날 이승만 역시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번 끓어오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히기 쉽지않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이에 호응하는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한다.
이번 시위는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승만 하야'가 주요사항
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질서정연하게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중에도 단 한명의 경찰도 그들
곁에 얼씬대지 않았다. 이는 당대의 교수라는 신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 그 대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으나 이미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계엄군은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마다 마치 상징처
럼 탱크로 뒤를 따랐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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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 역시 군부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것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자국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개입하지 않았으나 1987년은 상황이 달랐다.
1987년 6월 당시 미소 냉전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완화되었고 미국의 이익이나 안전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88올림픽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한국의 정치상황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6월 16일 , 미국 국회에서 민주화 결의안이 제출,의결되었으며 6월 17일 CIA한국지부장 존스타인과 YS의 최측근 최형우와의 만남에서 최형우는 '이게 다 전두환의 후견인 노릇을 한 미국 탓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된다면 YS와 자신은 광화문 앞에서 분실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밖에도 한국의 여러 주요인사와 접촉한 CIA는 군부대가 출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이를 주한미국대사관 및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미 레이건 대통령 또한 즉시 한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군 부대 투입을 막고자 하였으나 주미 한국대사인 김경원이 '전두환의 성격상 특사를 보내면 오히려 성질만 돋구게 된다'고 말하며 다른 방식의 경고 메세지를 요청했다. 이에 백악관은 대통령 친서 전달로 단계를 낮췄다.
결국 전두환은 만일 정권이 평화적으로 이양될 경우 전두환의 방미를 주선하겠다는 레이건 친서와 12.12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측근이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8.독재정권의 항복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과 미국과의 관계에 위협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등 여러가지 상황으로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선택한다.
전두환은 이틀에 걸쳐 김영삼과 만나 협상을 했으나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등에 대한 김영상의 요구를 거부하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국국민당 총재 이만섭과의 회담에서 이만섭이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하는게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노태우 또한 직선제를 설득한다.
25일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고 6월 20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6월 항쟁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최대 인원이 모인 이한열의 장례식행렬에서 완전한 전두환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광화문 4가로 향하던 군중들은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뿔뿔히 흩어지고 6월 항쟁의 막이 내려진다.
9. 6월 항쟁의 결과
6월 항쟁이 끝난 후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확정되며 제 6공화국으로 개헌하게 된다.
6월 항쟁은 수십년에 걸친 군부 독재를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물러나게 한 사건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제 6공화국에의해 굴러가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이제까지의 운동과는 다르게 국민들이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정치적 열망만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데서 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의 노래-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
아 우리들의 수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사랑 우리의 나라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손 맞잡은 우리 전지하는 우리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투쟁하는 우리 사랑하는 우리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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