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핫초코

1.강화도 조약(1876년 2월 27일)의 배경

1868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이루고 조선에 외교관계복구 요청 서계를 보낸다.하지만 종전과 다른 외교문서 형식과 문서속의 황(천하를 통일한 왕), 칙(황제의 명령) 등의 표현은 사대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배경으로써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를 거절한다. 

이에 분개한 일본은 당시 일본내부의 사회문제(사민평등, 단발령등으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음)에 대한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정한론을 주장하고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는 등 강화도에서 만행을 저지른다.

(정한론 : 1870년대, 일본정계에서 강력하게 대두된 조선에 대한 공략론)

 

 

 2.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조선 부산해역에 접근.                         

→ 일본함장 이노우에가 '조선과의 상호통상위해 방문 및 조선해안 탐사 목적'이라고 주장함.

→ 일본 군함 운요호가 서해의 강화도까지 침입, 강화도 해안에 내림.

→ 일본군을 발견한 조선군의 경고사격.

→ 일본군들이 운요호함으로 돌아가 함포발사,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임.

→ 일본군, 영종도 상륙, 근대식 무기로 조선 수군과 무고한 현지 주민들까지 무차별 학살.

 

운요호 사건을 통해 일본은 조선침략의 꿈을 꾸었으나 당시 조선과 청의 관계는 사대관계로서 청이 천자국, 조선이 제후국이었다.이대로 조선을 침략하면 청이 나설 가능성이 크므로 일본은 모리공사를 청에 파견하여 '조선은 청의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일체 조선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는다.

 

당시 청은 영국, 프랑스,러시아와 마찰로 일본과의 대립을 원치 않았던 청은 일본과 조약을 맺기를 종용하는 서신을 조선에 보낸다. 위와 같이 청과 교섭이 끝난 일본은 군함3척 부산항으로 끌고과 기선제압을 위해 무력시위를 벌이고 강화도로 향하고 긴장한 조선은 강화도에서 정식회담을 열게 된다.

세번에 걸친 회의끝에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지지하던 위정척사파와 개방을 주징하는 개화세력(이규경,최한기,박규수,유흥기,오경석)대립에서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사에 따라 결국 개국을 결정하게 된다.

 

3.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 의 내용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떄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  이후 양국간에 오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을 별도로 구비한다.조선은 한문을 쓴다.

◎ 제4관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살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한다.

제5관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10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하였을 경우 조선국에 교섭하여 인민은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 심리하여 판결한다.

 

이하 총 12관의 조약으로 구성되어있다.

 

일본은 제 1관을 통해 조선이 자주국가라고 내세우며 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려 하였고 4,5관을 통해서 부산 이외의 항구를 2개 더 열도록하였다.

마침내 개항한 항구는 인천과 원산으로 인천은 한성과 가까웠고 원산은 러시아 견제용이었다. 또한 위에는 생략했으나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으로 제7관은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마음대로 측량하도록 허락한 내용이며 10관 또한 치외법권을 주장함으로써 불평등조약임을 여실히 드러내있다.

 

4. 부록과 무역규칙

강화도 조약을 맺은지 7개월 후 일본은 부록과 추가조항을 통해 세부적인 내용을 확정한다.

제1관  각 항구에 주재하는 일본국 인민의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 지방에서 일본국 배가 파선되어 긴급할 경우 지방관에 알리고 해당 지역의 연로를 통과할 수 있다.

제2관  사신 및 관리관이 발송하는 공문,서신 등 우편을 통한 비용은 사후에 변상한다. 인민을 고용하여 보낼때에는 각각 그 편의에 따른 다.

제4관  이후 부산항구에서 일본국 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부두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로정한다. 동래부  중의 한 곳에 있어서는 특별히 이 이정안에서 오갈 수 있다. 일본국 인민은 마음대로 통행하며 조선 토산물과 일본국 물품을 사고 팔수 있다.

제7관  일본국 인민은 본국의 현행 여러 화폐로 조선국 인민이 소유한 물품과 교환할 수 있으며,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화 폐로 일본국에서 생산한 여러가지 상품을 살 수 있다.

 

이하 총 11관의 내용으로 부록을 통해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설정되었으며 일본화폐의 사용도 허가된것을 알 수 있다.

 

5. 강화도 조약의 의의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비록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맺은 조약이나 흥선대원군까지 지켜오던 쇄국정책을버리고 개방을 하게 된 계기이다. 그러나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기때문에 이후 조선에 들어오는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 또한 일본과 같은 지위를 얻기를 원했기때문에 그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맺게된다. 이 모든것들이 조선왕조 몰락의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이 곳에는 더 많은 정보들이 있어요! :)

[Healthy Tips] - 건강해지는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goodmyhealthy/


[핫초코] - 카카오 스토리 채널 

https://story.kakao.com/ch/hotchoko/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공유를 부탁드려요!

당신의 좋아요는 글쓴이에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신정변의 배경과 의의  (0) 2018.05.03
임오군란의 배경과 결과  (0) 2018.05.02
6.25전쟁의 원인과 전개과정  (0) 2018.04.11
4.19혁명이란  (0) 2018.04.05
6월 민주화 운동(2부)  (0) 2018.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