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19 혁명의 배경
1960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은 떄, 민주화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국토는 황폐해지고 당장 먹고 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민주주의에 열광한
데는 언론의 영향이 컸다.
당시 최대 지식인 계층이 속해 있던 1950년대의 언론은 친정부적인 서울신문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외 각 언론사들은 칼럼,사설,논설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려 했다.
이에 자유를 던져버린 이승만정권의 날조 및 공작행위,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등 언론탄압은 나날이 심해졌고 민중들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반감 역시 점점 높아져만 갔다.
국가 총 예산안의 10.5%가 교육관련 지출일 정도로 당시 사회의 교육열은 요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붐'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할 수있다는 기대감으로 빈민층에서 교육열이 더 높았고, 국민학교의 의무교육화도 이때 채택되었다.
정부의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학생수는 3배로 증가했으며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일괄적으로 포함되었다.
또한 이 시기 대학생들의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비슷한 소득 수준의 나라들과 비교했을때도 제3세계국가들에 비해 아주 높은 비율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최우선 목표가 문맹퇴치였기에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내 한국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에 이승만 지지자들은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없었고 미국의 원조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이시대의 대학생과 다른 점은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 '배운사람'은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이 모든 것들을 종합했을때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고취는 당연한 결과라고 봐야하겠다.
2. 혁명의 시작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보통 5월에 선거가 치뤄지므로 무려 10-11개월이나 이른 후보지명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총력전을 펼치라는 뜻이었다.
7월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인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하고,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만 남은 상황에서 이승만
은 조병옥이 병중인 걸 알면서도 농번기에 선거를 해서는 안된다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끝까지 조기선거를 주장했다.
야당과 여론의 비열한 짓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당이 선거에 총력전을 벌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러한 수를 쓴 것이다.
끝끝내 이승만의 뜻대로 3월 15일 조기 선거가 결정 되었다.
3. 2월 28일, 대구 학생운동
2월 28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유세일은 학생들의 유세장 출입을 막기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킨다.
이에 대구 경북고 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대구 여러개 고등학교들도 합세하여 시위하였으나 이승만정부는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일축,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
그러나 2.28 학생민주화의거는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4.19혁명의 첫 시발점으로써의 의의가 있다.
4. 3.15, 제 1차 마산의거
3월 15일 결국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난다.
특히 마산의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는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로 투표함이 엎어지자 그 투표함 속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된
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관계없이 투표함을 엎었다는 이유로 민주당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인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경찰서로 끌려간다.
도의원인 정남규는 쉽게 풀려났으나 그 길로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 민주당원들과 논의후 투표포기를 선언하고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무효
를 주장, 민주당원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며 시내 곳곳에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모여들었고 그 인원이 만여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현장진입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 온 마산시내가 정전사태로 캄캄해지자 경찰이 무차별 총기를 난사
하고 8명 사망 ,8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당시 많은 여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로 일어난 시위였다고 변명하며 해당 책임자들
의 사임또는 교체로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민주당은 3.15선거 무효를 선언한다.
5.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한편 3.15마산의거 이후 험악하던 마산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 입학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왔던 상고생 김주열군이 행방불명되었다 4월 11일 신포동 부둣가에서 떠오른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시위에 참석한 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경찰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 바다에 내다 버려진것이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 했으나 이미 소문은 삽시간에 시내로 퍼졌고 마산시내 고등학생들이 시내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반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커진 시위대는 마산시청으로 난입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또 다시 두명의 시민이 사망하게 된다.
6. 4.19혁명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그 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때의 시위는 그동안 미미했던 대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4월 18일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에서 고려대생이 피습당하고 4월 19일 오전 서울 대광
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 그 소식을 들은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게 된다.
정부는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에 합세, 이에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 공포탄
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한다. 이 날 하루 서울의 총 사망자수는 104명, 그 외 지역에서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서울 지역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 곧 서울,부산,광주,대전,대구,전주,청주,수원일대에도 계엄령을 선포하였
다.
헌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다르게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기는 커녕 우호적이었다.
아마 군부 내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위대는 점점 압박해오는 경찰과 계엄군의 진압으로 고려대학교 교정까지 몰리고 최후의 저항을 하던중 계엄군의 사단중 조재미 준장이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 즐비하게 놓인 태극기로 덮힌 희생자들 앞에 조의를 표했다.
이에 시위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7. 교수들의 시국선언, 이승만 하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미국정부마저 이승만정권에 등을 돌리게 도고 얼마안되 국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이기붕 부통령 또한 당선 사퇴 고려를 발표하고, 그 다음날 이승만 역시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번 끓어오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히기 쉽지않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이에 호응하는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한다.
이번 시위는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승만 하야'가 주요사항
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질서정연하게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중에도 단 한명의 경찰도 그들
곁에 얼씬대지 않았다. 이는 당대의 교수라는 신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 그 대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으나 이미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계엄군은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마다 마치 상징처
럼 탱크로 뒤를 따랐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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