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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경과 준비과정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1904)이 발발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요충지로 쓰기 위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위해 제1차 한일협약(고문정치)을 맺는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를 설치 하는 등 고종의 비준도 없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1905)을 체결한다. 고종은 무효화를 선언하고 언론과 각 의병활동이 일어났으나 결국 1907년 고종은 강제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차관정치)이 체결되며 군대의 해산과 함께 정미의병 또한 실패로 돌아간다. 


 1910년 일본에게 조선이 강제합병된 후,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1차 조선교육령으로 칼찬교원들이 등장하고 헌병경찰제도로 모든 집회와 단체활동은 일절 엄금되었다. 


 일본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표면적으로는 근대식 토지소유의 지향이었으나 실상은 국토의 40%이상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이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기고 결국 이 토지는 싼값에 일본인들에게 팔린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연주와 만해주로 떠나는 등 몰락하게 된다. 


 또한 회사령을 내려 민족자본을 억압하고 광업령,어업령,산업령을 선포하는 등 여러면에서 우리민족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이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를 선언하고 소련의 레닌 역시 제국주의의 반대 일환으로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 와중 1919년 1월 고종의 사망에 이완용 독살설이 퍼지면서 반일감정은 극도로 격앙된다. 

1918년 대종교계 인사(이승훈,한용훈,손병의 등)39명이 만주에서 무오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1919년 2월에는 일본도쿄에서는 조선독립청년단 600여명이 2.8독립선언을 발표한다. 


 2. 민족대표 33인의 움직임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일으킬 경우 만약의 유혈사태를 대비하여 기생요릿집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 후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다.



3. 대한독립만세!

 한편 이미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민중들은 민족대표들의 갑작스런 장소변경에 당황했다. 학생들은 그들이 태화관에 틀어박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항의했으나 탑골공원에서의 낭독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듣게 된다.

 이에 학생그룹은 그들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낸뒤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운동을 벌였고 일반 민중들이 가세하여 시위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보신각을 거쳐 각 숭례문,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헌병은 이들을 무력진압하려 하였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저녁6시 자진해산했다. 다음날인 3월2일 조선총독부는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과 참가자들을 찾아내 연행하기 시작했고 그날 하루만 무려 1만여명이 넘게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평양, 의주, 선천, 안주,원산,진남포 등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3월2일은 평양까지 퍼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대량학살사건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기도 했다(ex,제암리 학살사건)


 

5. 결과와 영향

  예상치 못한 우리 민중들의 저항에 적잖이 놀란 일본은 기존의 강압적 무력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이후 일본의 정가에서는 조선에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려 할때마다 '3.1운동을 잊었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3.1운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 스스로가 주도한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3.1운동은 여러매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 대만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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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운동(1894)의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198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이다. 

초기에는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우세했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되고 만다.  

처음 시작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이었고 그  진행과정에서 점차 정치적운동으로 성장, 민란과 결합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내걸은 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척양척왜: 일본과 서양을 배척)


초기 민란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단순하게 농민들의 궐기운동과 내전으로 그칠 것으로 여겨졌으나 조선조정의 청나라군대 요청. 청과 일본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으로 일본군까지 주둔하게 된 결과 대립관계에 있던 양국의 관계는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두 양대 세력의 한반도 주둔명분이 되었고 청과 일본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끊는 계기가 되고 일본에게는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의 계기가 된다.


(*텐진조약: 청.일 사이에 맺은 조약, 조선내에서 청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시모노세키조약 : 청.일 전쟁, 일본의 승리, 전후 처리를 위해 청과 일이 맺은 조약)


2. 동학농민운동의 과정


1893 보은집회(충청도) : 동학 제 1대 교주인 최재우의 '교조신원운동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사건으로 불만 고조->'고부농민봉기(1894.1)' 발발

정부가 봉기수습위해 안핵사 이용태 파견->동학군 체포 및 살해->민란 더욱 확대

1차 동학농민봉기(전봉준,김개남,손화중) : 백산봉기 -> 황토현전투 동학군의 승리 ->전주성 무혈점령(1894.4.27)


 

 


3. 외국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자 정부는 전주성 탈환을 위해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극의 역사를 초래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고종이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김병시가 청과 일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의 진입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나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5월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고 뒤이어 6일 일본군까지 제물포에 상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놀란 조정은 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외국군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 텐진조약에 의거 조선의 변란이 진정되면 즉시 두 나라 모두 철수한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군 또한 상황이 여러모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해 조정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발표한다.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하고 자발적 개혁을 명분으로 정부는 교정청, 농민들은 민생안정을 위해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자치 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한다. 


 ◈동학군의 폐정개혁 12개조

탐관오리의 처벌

신분제도 폐지(평등강조)

외세와 내통하는 자 처벌

토지개혁(토지의 균등분배) 등 주장


4. 2차 봉기

  

청과 일본군에게 민란이 수습되었으니 물러날것을 권고했으나 갑신정변(1884)이후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은 조선의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며 철군요구를 듣지 않았다. 러시아와 영국 등 여러 유럽국가들의 중재에도 불구, 심지어 동학난은 다 끝난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이니 공동철수하자는 청군의 제안까지도 무시해버린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과의 모든 조약 폐기,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 김홍집(온건 개화파-친일)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1차, 1894)을 진행했고 전장이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분노한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킨다. 


 갑오개혁(1984)의 내용

정치 -연호를 '개국'으로 바꿈(청의 종주권 부인), 과거제도 폐지, 6조->8아문으로 개정(왕권약화)

경제 -재정일원화(탁지아문), 은본위 화폐, 조세의 금납호, 도량형 통일 등

사회 -신분제도 폐지, 고문,연좌제 금지, 과부재혼 허용 등 


5. 패퇴

 

일본의 이러한 행태에 화가난 동학군은 당시 이념차이로 나눠졌던 북접(손병희)과 남접(전봉준)이 하나로 모여 한성탈환을 목적으로 논산에서 결집한다. 이때 일본군의 주도하에 정부군과 일본군 또한 농학군을 진압할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동학군이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사들로 조직된 일본군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11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며 동학군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6. 의의


전주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1984)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 볼 수 있으며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근대성을 지향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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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 운동의 전개와 의의

 5.18 민주화 운동, 또는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79년 12월12일 부터 1980년 5월27일까지 전두환의 독재군부가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군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까지도 무차별로 학살한 사건으로써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1979년 박정희의 독재정부가 끝나고 서울의 봄으로 한창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던 시기,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이로인해 시민들의 항의나 투쟁이 더욱 거세지자 신군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12.12군사반란 시기가 하필 대학생들의 겨울방학,연말이라는 점과 맞물려 이 안개정국상황은 대학생들이 개학을 맞은 3월이나 되어서야 수면으로 드러났다.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처음 민주화운동발생 당시 군부의 통제로 언론은 이 사건을 '광주사태'로 일컬었다. 하지만 군부정권의 종료후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위와 같은 명칭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 사태 등으로 불리며 일어난 날짜를 따라 5.18로 부르기도 한다.

 1980년 5월 18일 군사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군과 이를 막으려는 계엄군간의 격한 대립은 결국 총격전으로 이어지고 사태는 진압되었으나 수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이 과장에서 상당한 민간인 살해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사례로서 많이 알려지게 된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희생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을 계엄군에게만 지워서는 안된다. 그들이 시민들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 또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닐것이며 어떤부분은 강압에 의한 또 어떤부분은 진실을 알지 못해 행한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모든 계엄군의 행위가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 이 과정에서 정당치 못한 무차별적인 학살 또한 분명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제 1차 책임은 전두환과 군정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로 전두환이 시민군에게 발포를 지시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 책임이 전두환에게 있다는 것과 사실상 전두환이 지시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5.18민주화항쟁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애국세력과 정상적 대한민국체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권야욕을 달성하려는 정치군인들과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우리민족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다.

 *2011년 5월 25일, 5.18광주민주화 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로 등재되었다. 이는 기록 유산 중 현대사 관련 자료중 최초의 등재 자료이며, 유례 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기록이 투명하지 못해 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이유가 없다는 항의서한이 유네스코에 전해져 검토에 들어갔으나 물론 항의서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2011년 5월 25일 등재가 확정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희생하셨던 많은 열사분들의 희생과 노고를 떠올리며 우리 역사에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윈스터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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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아볼까요~?

1. 5월 이전

1986년은 인천 5.3운동과 10.28 건대항쟁으로 5공 정권의 민주하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민중들의 반발심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명 '탁억사건'이라 한다.

당시 운동권 학생 박종운의 행방을 캐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가 고문중 사망하자 이를 숨길목적으로 탁자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고 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에서 헤드라인으로 뽑아내 위와 같은 망언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박종철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명백한 고문에 의한 사망이란것이 밝혀지자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민중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해당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는 듯 보엿으나 당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발표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의 묵살로 민심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때 신한민주당이 제 1야당의 자리에 올라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개정 1000만 인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했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여당과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해 교섭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하며 여야 입장이 서로 뒤바뀐 듯 보였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작은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난오며 신민당은 결국 김영삼,김대중 세력이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쨌든 여,야 모두 겉으로는 개헌을 추진했으나 정부의 호헌조치로 이 논의 자체가 엎어지자 직선제 개헌으로 변화를 바라던 민중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진다. 

2. 항쟁의 서막

그러던 중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5.18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고문치사에 의한 박종철군의 죽음이 은폐,조작된 것을 폭로하자 민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6월10일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맞춰 박종철 사망사건 은폐 규탄집회를 전국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고려대 학생들의 종로시위를 시작으로 각 대학의 분위기도 항쟁에 대한 열기로 뜨거워 지고 있었다. 

3.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6월9일 집회 하루전, 연세대 학생들의 사전집회 행사 후 교외로 진출하려던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하고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던진 최루탄이 연세대학생 이한열의 뒤통수를 직격했다. 

같은 학교 학생 이종창의 부축으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결국 사망에 이른다. 이때 이종창이 이한열을 온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에 의해 찍혔고 이 사진을 뉴욕타임스와 중앙일보가 개재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4. 6월 10일,항쟁의 시작

 6월 10일 정부는 12시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봉쇄를 시작으로 집회의 확산을 막기위해 단축수업,조기퇴근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조치들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정부의 멍청한 대응에 비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6월10일 저녁 6시, 차량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지며 서울곳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를 보이는 족족 체포하는 경찰들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일부 시위대들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전부터 시작되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항쟁','6월 항쟁'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명동성당 항쟁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깐 나를 밟고 신부드를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추기경이 이와 같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경찰이 성당에 침투했다가는 전 세계 가톨릭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이라도 어찌할 수 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두환의 가장 큰 사업이었던 88올림픽이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에 의해 보이콧 당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황청역시 성당내로 공권력이 투입될 경우 전면적인 보이콧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 또한 헌금형식으로 성당안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등 시위대에 전면적인 지지를 표시했다. 

6. 항쟁의 진행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 갔습니다.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기간 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 6월11,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

6월 10일 대규모 시위로 긴장감에 휩싸였던 정국은 13,14일 주말이 찾아오며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청와대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정부는 내각 내 일부 온건파의 주장으로 성당안 농성자들에게 농성중단 시 아무도 구속시키지 않고 귀가시켜준다고  약속하였다. 농성단은 이를 받아들였고 다행히 당국은 이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자마자 다시 거짓말처럼 시위 인파가 쏟아져나왔다. 정부의 가장 큰 우려였던 광주를 포함하여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하였다. 서울 역시 명동성당 시위자들의 무사귀환을 보고 정부가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투쟁에 불을 붙였다. 

 또한 6월 18일은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폭격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 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을 웃돌며 이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염두할 정도 였다고 한다.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 되었고 이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던지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청와대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열린 군 고위회의에서 전두환은 다음 날 새벽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며 "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에게 19일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함과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며 무력진압으로 일련의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 통보하였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군대의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경찰력의 한계는 누가봐도 명백해 보였다. 서울의 시위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동원한 것이 오히려 지방의 시위가 더 과격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6월 중순으로 들어서며 시위는 전국적으로 더욱 과격해졌고 치안력의 한계는 점점 드러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대에 의해 경찰부대가 밀려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각 지방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신군청, KBS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 1공격대상이 되었고 시민들의 시위대에 대한 호응과 동조로 경찰들의 체력과 함께 사기까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최루탄까지 바닥나버린다면 경찰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7일 전두환이 세운 병력동원 계획이 정식 수립되었고 비상계엄령 선포 후,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마산,대전,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을 중점으로 병력을 집중 배치하기로 한다. 정부의 이와 같은 무력진압계획을 전달받은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시민들 틈에 섞여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하는 등 여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6월 민주화운동 뒷 이야기는 2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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