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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운동(1894)의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198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이다. 

초기에는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우세했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되고 만다.  

처음 시작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이었고 그  진행과정에서 점차 정치적운동으로 성장, 민란과 결합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내걸은 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척양척왜: 일본과 서양을 배척)


초기 민란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단순하게 농민들의 궐기운동과 내전으로 그칠 것으로 여겨졌으나 조선조정의 청나라군대 요청. 청과 일본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으로 일본군까지 주둔하게 된 결과 대립관계에 있던 양국의 관계는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두 양대 세력의 한반도 주둔명분이 되었고 청과 일본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끊는 계기가 되고 일본에게는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의 계기가 된다.


(*텐진조약: 청.일 사이에 맺은 조약, 조선내에서 청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시모노세키조약 : 청.일 전쟁, 일본의 승리, 전후 처리를 위해 청과 일이 맺은 조약)


2. 동학농민운동의 과정


1893 보은집회(충청도) : 동학 제 1대 교주인 최재우의 '교조신원운동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사건으로 불만 고조->'고부농민봉기(1894.1)' 발발

정부가 봉기수습위해 안핵사 이용태 파견->동학군 체포 및 살해->민란 더욱 확대

1차 동학농민봉기(전봉준,김개남,손화중) : 백산봉기 -> 황토현전투 동학군의 승리 ->전주성 무혈점령(1894.4.27)


 

 


3. 외국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자 정부는 전주성 탈환을 위해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극의 역사를 초래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고종이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김병시가 청과 일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의 진입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나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5월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고 뒤이어 6일 일본군까지 제물포에 상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놀란 조정은 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외국군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 텐진조약에 의거 조선의 변란이 진정되면 즉시 두 나라 모두 철수한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군 또한 상황이 여러모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해 조정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발표한다.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하고 자발적 개혁을 명분으로 정부는 교정청, 농민들은 민생안정을 위해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자치 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한다. 


 ◈동학군의 폐정개혁 12개조

탐관오리의 처벌

신분제도 폐지(평등강조)

외세와 내통하는 자 처벌

토지개혁(토지의 균등분배) 등 주장


4. 2차 봉기

  

청과 일본군에게 민란이 수습되었으니 물러날것을 권고했으나 갑신정변(1884)이후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은 조선의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며 철군요구를 듣지 않았다. 러시아와 영국 등 여러 유럽국가들의 중재에도 불구, 심지어 동학난은 다 끝난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이니 공동철수하자는 청군의 제안까지도 무시해버린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과의 모든 조약 폐기,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 김홍집(온건 개화파-친일)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1차, 1894)을 진행했고 전장이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분노한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킨다. 


 갑오개혁(1984)의 내용

정치 -연호를 '개국'으로 바꿈(청의 종주권 부인), 과거제도 폐지, 6조->8아문으로 개정(왕권약화)

경제 -재정일원화(탁지아문), 은본위 화폐, 조세의 금납호, 도량형 통일 등

사회 -신분제도 폐지, 고문,연좌제 금지, 과부재혼 허용 등 


5. 패퇴

 

일본의 이러한 행태에 화가난 동학군은 당시 이념차이로 나눠졌던 북접(손병희)과 남접(전봉준)이 하나로 모여 한성탈환을 목적으로 논산에서 결집한다. 이때 일본군의 주도하에 정부군과 일본군 또한 농학군을 진압할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동학군이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사들로 조직된 일본군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11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며 동학군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6. 의의


전주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1984)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 볼 수 있으며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근대성을 지향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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