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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유관순 열사


◎ 3.1운동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11.11)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윌슨이 제안한 14개조

의 전후처리 원칙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내,외 조선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서 희망의 불씨가 생겨나고 1919년 3월 1일부터 수개월에 걸쳐 한반도와 전세계각지의 조선밀집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

하게 된다. 


이는 일본제국의 한반도 강점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 운동이다. 

3.1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3.1혁명, 3.1독립만세 운동, 기미독립운동으로 칭하기도 하며 작년 2019년 3월 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 유관순 열사


190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류중권의 3남2녀중 차녀로 태어났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그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위험하니 참가하지 말라는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담을 뛰어넘어 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때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데 이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1919년 양력 4월 1일, 음력 3월 1일)이라하며 

이때 유관순 열사는 일본의 앞잡이인 친일파 조선인 정춘영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게 된다. 


이 와중 그녀의 부모는 일본경찰에게 살해당하고 그녀 자신도 5년형을 구형받았다. 

그녀는 수감생활중 대한민국독립만세를 외치다 모진고문으로 결국 1920년 9월 28일 사망하고 만다. 


관순이 업적대비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라는 주장과 함께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거나 부정하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써 국민통합과 국민의 애국심 고향에 큰 기여를 하고 대한민국의 기조를 공고히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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