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화운동(1부)
6월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아볼까요~?
1. 5월 이전
1986년은 인천 5.3운동과 10.28 건대항쟁으로 5공 정권의 민주하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시기였다.
그러던 중 1987년 민중들의 반발심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나는데 일명 '탁억사건'이라 한다.
당시 운동권 학생 박종운의 행방을 캐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가 고문중 사망하자 이를 숨길목적으로 탁자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고 하였고 이를 동아일보에서 헤드라인으로 뽑아내 위와 같은 망언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박종철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명백한 고문에 의한 사망이란것이 밝혀지자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지고 민중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해당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는 듯 보엿으나 당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발표와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의 묵살로 민심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이때 신한민주당이 제 1야당의 자리에 올라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개정 1000만 인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했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여당과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해 교섭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하며 여야 입장이 서로 뒤바뀐 듯 보였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작은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난오며 신민당은 결국 김영삼,김대중 세력이 탈당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쨌든 여,야 모두 겉으로는 개헌을 추진했으나 정부의 호헌조치로 이 논의 자체가 엎어지자 직선제 개헌으로 변화를 바라던 민중들의 반발이 더욱 거세진다.
2. 항쟁의 서막
그러던 중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5.18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고문치사에 의한 박종철군의 죽음이 은폐,조작된 것을 폭로하자 민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6월10일 민정당의 대통령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맞춰 박종철 사망사건 은폐 규탄집회를 전국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고려대 학생들의 종로시위를 시작으로 각 대학의 분위기도 항쟁에 대한 열기로 뜨거워 지고 있었다.
3.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6월9일 집회 하루전, 연세대 학생들의 사전집회 행사 후 교외로 진출하려던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포하고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던진 최루탄이 연세대학생 이한열의 뒤통수를 직격했다.
같은 학교 학생 이종창의 부축으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호송되었으나 결국 사망에 이른다. 이때 이종창이 이한열을 온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에 의해 찍혔고 이 사진을 뉴욕타임스와 중앙일보가 개재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4. 6월 10일,항쟁의 시작
6월 10일 정부는 12시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봉쇄를 시작으로 집회의 확산을 막기위해 단축수업,조기퇴근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조치들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정부의 멍청한 대응에 비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6월10일 저녁 6시, 차량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지며 서울곳곳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를 보이는 족족 체포하는 경찰들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일부 시위대들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전부터 시작되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항쟁','6월 항쟁'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명동성당 항쟁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깐 나를 밟고 신부드를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당시 명동성당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추기경이 이와 같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함부로 경찰이 성당에 침투했다가는 전 세계 가톨릭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권력이라도 어찌할 수 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두환의 가장 큰 사업이었던 88올림픽이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에 의해 보이콧 당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황청역시 성당내로 공권력이 투입될 경우 전면적인 보이콧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시민들 또한 헌금형식으로 성당안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주는 등 시위대에 전면적인 지지를 표시했다.
6. 항쟁의 진행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 갔습니다.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기간 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 6월11,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
6월 10일 대규모 시위로 긴장감에 휩싸였던 정국은 13,14일 주말이 찾아오며 시위가 소강상태에 이르자 청와대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정부는 내각 내 일부 온건파의 주장으로 성당안 농성자들에게 농성중단 시 아무도 구속시키지 않고 귀가시켜준다고 약속하였다. 농성단은 이를 받아들였고 다행히 당국은 이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자마자 다시 거짓말처럼 시위 인파가 쏟아져나왔다. 정부의 가장 큰 우려였던 광주를 포함하여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하였다. 서울 역시 명동성당 시위자들의 무사귀환을 보고 정부가 밀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투쟁에 불을 붙였다.
또한 6월 18일은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폭격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 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을 웃돌며 이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염두할 정도 였다고 한다.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 되었고 이제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던지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청와대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열린 군 고위회의에서 전두환은 다음 날 새벽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며 "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에게 19일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함과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며 무력진압으로 일련의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 통보하였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군대의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경찰력의 한계는 누가봐도 명백해 보였다. 서울의 시위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동원한 것이 오히려 지방의 시위가 더 과격해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6월 중순으로 들어서며 시위는 전국적으로 더욱 과격해졌고 치안력의 한계는 점점 드러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대에 의해 경찰부대가 밀려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각 지방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신군청, KBS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 1공격대상이 되었고 시민들의 시위대에 대한 호응과 동조로 경찰들의 체력과 함께 사기까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최루탄까지 바닥나버린다면 경찰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6월 17일 전두환이 세운 병력동원 계획이 정식 수립되었고 비상계엄령 선포 후,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마산,대전,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을 중점으로 병력을 집중 배치하기로 한다. 정부의 이와 같은 무력진압계획을 전달받은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시민들 틈에 섞여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하는 등 여러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6월 민주화운동 뒷 이야기는 2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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