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19 혁명의 배경
1960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은 떄, 민주화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은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국토는 황폐해지고 당장 먹고 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민주주의에 열광한
데는 언론의 영향이 컸다.
당시 최대 지식인 계층이 속해 있던 1950년대의 언론은 친정부적인 서울신문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외 각 언론사들은 칼럼,사설,논설 등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려 했다.
이에 자유를 던져버린 이승만정권의 날조 및 공작행위,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등 언론탄압은 나날이 심해졌고 민중들의 이승만정권에 대한
반감 역시 점점 높아져만 갔다.
국가 총 예산안의 10.5%가 교육관련 지출일 정도로 당시 사회의 교육열은 요즘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붐'에 가까울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교육을 통해 신분상승할 수있다는 기대감으로 빈민층에서 교육열이 더 높았고, 국민학교의 의무교육화도 이때 채택되었다.
정부의 문맹퇴치 5개년 사업을 통해 학생수는 3배로 증가했으며 민주주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일괄적으로 포함되었다.
또한 이 시기 대학생들의 수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비슷한 소득 수준의 나라들과 비교했을때도 제3세계국가들에 비해 아주 높은 비율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최우선 목표가 문맹퇴치였기에 미국의 원조금으로 미국내 한국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에 이승만 지지자들은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없었고 미국의 원조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다만 이시대의 대학생과 다른 점은 당시 대학교를 졸업한 '배운사람'은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
이 모든 것들을 종합했을때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과 고취는 당연한 결과라고 봐야하겠다.
2. 혁명의 시작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보통 5월에 선거가 치뤄지므로 무려 10-11개월이나 이른 후보지명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총력전을 펼치라는 뜻이었다.
7월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인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당하고,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만 남은 상황에서 이승만
은 조병옥이 병중인 걸 알면서도 농번기에 선거를 해서는 안된다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끝까지 조기선거를 주장했다.
야당과 여론의 비열한 짓이라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당이 선거에 총력전을 벌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러한 수를 쓴 것이다.
끝끝내 이승만의 뜻대로 3월 15일 조기 선거가 결정 되었다.
3. 2월 28일, 대구 학생운동
2월 28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유세일은 학생들의 유세장 출입을 막기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 등교시킨다.
이에 대구 경북고 학생들은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며 반발하고 대구 여러개 고등학교들도 합세하여 시위하였으나 이승만정부는 공산당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일축, 시위대를 해산시킨다. '
그러나 2.28 학생민주화의거는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4.19혁명의 첫 시발점으로써의 의의가 있다.
4. 3.15, 제 1차 마산의거
3월 15일 결국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난다.
특히 마산의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는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로 투표함이 엎어지자 그 투표함 속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된
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관계없이 투표함을 엎었다는 이유로 민주당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인 민주당 도의원 정남규는 경찰서로 끌려간다.
도의원인 정남규는 쉽게 풀려났으나 그 길로 오동동 마산시당부로 가 민주당원들과 논의후 투표포기를 선언하고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무효
를 주장, 민주당원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며 시내 곳곳에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모여들었고 그 인원이 만여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현장진입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 온 마산시내가 정전사태로 캄캄해지자 경찰이 무차별 총기를 난사
하고 8명 사망 ,8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당시 많은 여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의 사주로 일어난 시위였다고 변명하며 해당 책임자들
의 사임또는 교체로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끓어오르는 민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민주당은 3.15선거 무효를 선언한다.
5. 4월 11일, 제2차 마산의거
한편 3.15마산의거 이후 험악하던 마산분위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 입학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왔던 상고생 김주열군이 행방불명되었다 4월 11일 신포동 부둣가에서 떠오른 그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시위에 참석한 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고 경찰이 시신을 수습하던 중 바다에 내다 버려진것이다.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 했으나 이미 소문은 삽시간에 시내로 퍼졌고 마산시내 고등학생들이 시내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일반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커진 시위대는 마산시청으로 난입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또 다시 두명의 시민이 사망하게 된다.
6. 4.19혁명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그 날의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때의 시위는 그동안 미미했던 대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4월 18일 대학생들이 벌인 시위에서 고려대생이 피습당하고 4월 19일 오전 서울 대광
고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 그 소식을 들은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게 된다.
정부는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이미 10만명이 넘는 시민과 학생들이 시위에 합세, 이에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 공포탄
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한다. 이 날 하루 서울의 총 사망자수는 104명, 그 외 지역에서 다수의 시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서울 지역일대에 긴급 계엄령을 선포, 곧 서울,부산,광주,대전,대구,전주,청주,수원일대에도 계엄령을 선포하였
다.
헌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다르게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기는 커녕 우호적이었다.
아마 군부 내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위대는 점점 압박해오는 경찰과 계엄군의 진압으로 고려대학교 교정까지 몰리고 최후의 저항을 하던중 계엄군의 사단중 조재미 준장이
단 두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 즐비하게 놓인 태극기로 덮힌 희생자들 앞에 조의를 표했다.
이에 시위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7. 교수들의 시국선언, 이승만 하야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미국정부마저 이승만정권에 등을 돌리게 도고 얼마안되 국무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이기붕 부통령 또한 당선 사퇴 고려를 발표하고, 그 다음날 이승만 역시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번 끓어오른 분노는 쉽게 가라앉히기 쉽지않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이에 호응하는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한다.
이번 시위는 이전의 시위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으나 이번에는 '이승만 하야'가 주요사항
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질서정연하게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며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중에도 단 한명의 경찰도 그들
곁에 얼씬대지 않았다. 이는 당대의 교수라는 신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 그 대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으나 이미 이승만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던 계엄군은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마다 마치 상징처
럼 탱크로 뒤를 따랐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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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달걀의 유래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
오늘은 그리스도교에서 성탄절의 위상을 뛰어넘는 대축제일이자 명절인 부활절(Easter)입니다.
사실 공식 명칭은 주님 부활 대축일이며 개신교에서 부활절이라 부른다고 하네요.
부활절은 예수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이틀 뒤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춘분 이후 첫 보름달이 뜬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보통 부활절에는 달걀(Easter egg)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는데요.
부활달걀 풍습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부활절 달걀은 바빌로니아 제국의 세미라미스 여신에게서 유래되었고,
세미라미스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슈타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단어 '이스터'(Easter)의 유래라는 설도 있습니다.
부활절 행사에 쓰이는 달걀은 적당히 삶은 뒤 알록달록하게 칠하고 계란으로 상대방의 머리를 쳐서
벗겨먹는 관습이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는 부활을 축하하고 상대방을 축복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종종 삶은 달걀 사이에 날계란을 끼어넣어 상대방에게 장난을 치는 경우도 있어
장난기가 있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스터 에그를 칠하고 꾸미는 방식도 각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요.
그리스에서는 예수가 죽으면서 흘린 피와 구원을 의미하기 위해 붉은 색으로 칠하고 있으며
이 붉은 계란을 서로 부딪혔을때 어느 쪽에 흠집이 갔는지를 보고
한 해의 운세를 점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동방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등지에서는 보석으로 장식한 보물로서
이스터 에그를 만든다고 합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상당히 고가로 매겨지기도 하는데요,
그중 제정 러시아의 황제 가족을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 보기만 해도 눈이부신
파베르제의 달걀이 가장 유명하며,
전세계에 단 50개만 있고 이 중 현존하는 것은 42개 뿐이라고 하네요.
그 외 한국과 일본에선 학생들이 예쁘게 칠한 계란을 교회등에서 나누어주며
유럽이나 북미에선 진짜 달걀 대신 초콜릿으로 된 이스터 에그를 선물한다고 합니다.
또한 초콜릿 토끼도 있는데요,
이는 독일에서 유래한 부활절 토끼(Easter rabbit)로 이 토끼는 부활절 계란을 들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보내는지 지켜본다고 하네요.
(고난주간 : 예수가 로마군에 붙잡혀 빌라도의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기까지
지상에서 겪은 고난을 기념하는 한주간)
번외로 프로그래머들이 부활절 토끼가 부활절 계란을 숨기듯이
프로그램 내에서 장난을 치는 것을 이르기도 하고
현재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컴퓨터 프로그램 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음반, 서적 등 각종 미디어에서 제작자가 장난으로 숨겨둔
내용들을 총칭한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고대 서적에서도 가끔 찾아볼수 있다고 하네요)
종종 북미 영화를 보면 곳곳에 숨겨놓은 알록달록한 부활절 달걀을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보물찾기 하듯 찾아 주워담는 장면이 있기도 한데요.
종교의 의미를 떠나 아이들을 위해 이런 이벤트도 가끔 괜찮을 것 같네요.
이상 핫핫초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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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
부를 결정하는 주요 인자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 습관에 있다고 하는데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을 알아볼까요!!
"저는 매일 목표에 집중합니다. "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62%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6%
부유한 사람들은 매년, 매달 목표를 설정할뿐 아니라 이들중 67%가 그 목표를 서면으로 작성해둔다.
만약 당신에게 두가지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성취가능해야하며 행동으로 취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매일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도 항상 인지하고 있다.
"저는 매일 해야 할 일 목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81%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19%
부유한 사람들은 할 일 목록을 매일 작성하며,
그 중 67%는 그 목록의 70%이상을 착수한다.
"저는 하루에 한시간이나 그 이하로 TV를 봅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67%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23%
부유한 사람들이 TV를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의 의지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대신 그들의 습관이 독서와 같은 다른 습관으로 길들여져 있기때문에 TV를 많이 보지 않는 것 뿐이다.
또한 그들은 재미삼아 책을 읽지 않는다.
"저는 독서를 좋아해요"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86%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26%
부자들은 독서를 좋아하지만 비소설류, 특히 자기계발 서적을 선호한다.
그들은 자신을 개선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탐욕스런 독서가들이다.
"출근길에 오디오 북을 듣습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63%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5%
여러분들은 출근길 오디오북을 통해 통근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저는 제 일에 필요한 것 이상을 합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81%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17%
부유한 사람들의 86%가 주 평균50시간 이상을 일하지만
그들중 단 6%만이 직장생활에 불행을 느낀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저는 정기적으로 복권을 합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6%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77%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이 항상 안정성 있는 투자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중 대부분은 재정적인 위험을 감수하는 사업가들이다.
그들은 위험을 무릎쓰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저는 매일 칼로리를 계산합니다."
-동의하는 부유한 사람 : 57%
-동의하는 가난한 사람 : 5%
부유한 사람들은 건강을 소중히 여긴다.
건강히 곧 그들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이상 성공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었습니다. 직장생활 10년차, 주위 동료들을 지켜보며 문득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는데요. 정말 성실하게 하루종일 쉬지도 않고 눈코뜰새 없이 10여년간 일을 해왔지만 다소의 연봉인상과 진급은 있을 지언정 그들의 생활은 크게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성실히 열심히 살다보면 퇴직후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보상이 따르면 좋으련만 점점더 상승하는 물가에 집값에 샐러던트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현대인들은 미래가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일에치여 허덕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왜 항상 제자리 걸음인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보며 그 이유를 조금씩 찾고 고쳐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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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나물의 종류와 효능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겨우내 차가운 땅 밑에서 추위를 이기고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자라나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봄하면 무엇보다도 봄나물이 떠오르는데요.
냉이국, 초장에 찍어먹는 두릅과 돌나물, 미나리 삼겹살, 쑥떡, 곤드레 나물 등등 생각만해도 침이 고이네요
오늘은 맛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까지도 책임질 대표 봄나물의 종류와 효능에 대해 알아볼까요!!
1. 냉이(Shepherd's purse)
봄나물의 대표명사 냉이는 들이나 밭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생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높이는 10~50센티 중간이며 꽃은 4~6월에, 열매는 6~7월쯤에 열립니다.
번식력이 매우 강해 길가 여기저기 피어있지만 매연이 많은 오염된 땅에 난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로 국을 끓일때 향긋한 향이 나게 하기 위해 넣으며 그밖에 비빔밥, 부침개, 나물로 먹기도 하는데요.
종종 흙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뿌리를 제거하고 먹는 것은 인삼의 뿌리는 버리고 줄기만 먹는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냉이 고유의 단맛과 향은 뿌리쪽이 더 강하다고 하네요.
*냉이의 효능*
1. 봄철 춘곤증 극복
다양한 비타민과 섬유질이 춘곤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2. 눈건강, 위장튼튼, 독소해소
동의보감에도 냉이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달고 독이 없으며 피를 간으로 운반, 눈을 맑게 해준다고 기록되있다고 하네요!
2. 돌나물(Stonecrop)
돌나물은 흔히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주로 산에서 자라며 한국전역, 일본, 중국 등지에서 분포합니다.
번식력이 좋아 볕이 잘 드는 구석에 심어놓기만해도 아주 잘 자란다고 하네요.
대표적인 돌나물 음식은 초장에 버무린 새콤달콤한 돌나물 무침이 있지요.
그 밖에 겉절이, 술, 생채,김치 등 다양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돌나물의 효능*
1. 심장, 혈관 질환에 탁월
체 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독소를 빼주기 때문에 심장, 혈관질환에도 탁월!!
2. 골다공증 예방
우유의 2배이상의 높은 칼슘함유!!
3. 해열, 해독작용이 높고 벌레물린곳에 효과 만점
3. 두릅(Aralia Sprout)
'산나물의 왕'이라 불리는 두릅은 겨우내 뿌리에 저장되 있던 영양분이 가지 끝에 새순을 맺은 두릅나무의 어린순으로
'목말채' 또는 '모두채'라고도 합니다.
대략 3~5월 즈음 순이 나오는 시기에만 채취, 수확하며 가지의 맨 윗부분의 두릅이 가장 최상급이라고 하네요.
보통 부드러운 어린순을 나물로 무쳐먹거나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데요.
더 자라서 나물로 먹기 힘들때는 절임으로 먹기도 합니다.
두릅나무의 뿌리도 흙 부분을 잘 닦아내면 먹을 수 있다는데요.
이 뿌리에는 약간의 마취 성분이 있어 자연산 국소마취제라고도 하네요.
하지만 생으로 먹다가는 입에 마비가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두릅의 효능*
1. 혈액순환, 치매 예방, 동맥경화 예방
두릅에 다량 함유된 비타민 B군이 혈액순환, 치매, 동맥경화 예방에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2. 혈액순환, 피로회복
4. 달래(Wild recambol)
달래는 봄을가장 먼저 알리는 채소 중 하나로 소산, 야산, 산산 등이라고도 불리며 한국, 일본,중국, 동북부 등에서 주로 자랍니다.
톡쏘는 매운맛이 봄의 미각을 자극하는데요.
특유의 알싸한 맛과 향으로 달래무침, 달래전, 달래 김치 등 여러가지요리에 활용 가능합니다.
*달래의 효능*
1. 항산화 효과 달래의 풍부한 베타카로틴 비타민 A가 항상화 효과에 탁월하다고 하네요. 2. 시력회복과 눈건강 비타민 A가 체내 활성를 제거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때문에 눈건강에도 효과만점!! 3. 소화작용, 식욕촉진 달래에 함유된 알리신 성분이 위액의 분비를 촉진!! 소화작용, 식욕촉진 아주 탁월!! 4. 빈혈예방 철분, 무기질, 비타민 성분 또한 풍부하여 빈혈예방에도 좋다고합니다.
이상 봄철 식욕을 돋구는 대표 봄나물 4가지를 소개해드렸습니다.
저는 쓰는 내내 군침이 돋네요. 이번주말은 나물 파티를 벌여야 할 듯합니다. *^^*
맛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은 봄나물과 올 봄 미각과 건강 다 챙겨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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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안에 사라질 6가지 직업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
오늘은 10년안에 사라질것같은 직업 6가지 를 들고왔습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향후 5~30년 안에 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전망이라고 하는데요.
아래의 직업군들이 왜 필요없어지게 되는지, 그리고 왜 그것들을 피해야 하는지 알아볼까요!!
1. 소매상인(retailer)
셀프서비스, 체크 아웃의 유입과 자동화된 구매시스템으로 인해, 전형적인 소매 금융업 종사자가 사라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쇼핑방식의 자동화, 개인주의의 발달 등으로 고객들은 기존의 사람대 사람으로 구매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덜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미 해외에서는 여러 대형마트들에서 간단하게 상품을 스캔한 뒤 바로 결제 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상용화 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지 상상만해도 아찔하네요.ㅜㅜ)
2. 텔레 마케팅(telemarketer)
근래들어 보다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이메일, 문자, 카톡 등) 점차 바뀌다 보니 이전과 같이 직접 전화를 한다거나 하는
구식 텔레 마케팅은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3. 여행사(travel agency)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로인해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도 유사한 사이트를 통해 더 빠르고 저렴하게 여행을 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행사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의 발달로 더이상 제3자를 통하지 않고도 다양한 매매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4. 택시 운전사(taxi driver)
4차 산업혁명(The forth industrial revolution)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산업중의 하나가 자동차 산업이라고 합니다.
기술의 발달로 자율주행차의 상용화와 GPS기술이 적용된 앱이 일반화 된다면 더이상 택시를 부를 일이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네요.
5. 출판사 및 인쇄소(publisher and printing office)
산업현장에서 인쇄매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더이상 놀랄일이 아닙니다.
엔터테인먼트와 뉴스 매체등이 점점 디지털화 되가면서 출판사들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기업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하네요.
6. 우체부(post office)
기술과 이메일 등 통신의 발달로 우편 업무 종사자의 필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정부 주도의 일자리는 민간 기업들이 이 자리를 대신하게 됨에 따라,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회조차 거의 없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이상 향후 10년 내에 사라질 전망인 6가지 직업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 줄 줄만 알았던 인터넷과 각종 자동화 시스템의 발달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얘기인것 같네요.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이 생겨나는 다양한 기술과 직업군 등 여러가지 순기능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레 겁먹지 말고 앞으로 이 속에서 우리 스스로는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네요 ^^
이상 핫핫초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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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여왕, 벚꽃의 유래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
드디어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수놓을 벚꽃의 계절 4월이 다가왔습니다.
혹시 벚꽃의 꽃말 다들 알고 계신가요?
벚꽃의 꽃말은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 순결, 뛰어난 아름다움과 절세미인, 정신미, 교양, 부, 번영 등 이라고 합니다.
짧은 순간 화사하게 피었다가 실바람에도 꽃잎이 쉬이 떨어져버리는 것이 삶의 덧없음을 느끼게끔 하긴 하네요
하지만 조그만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잎과는 달리 벚나무 자체는 자생력이 아주 강해서 팔만대장경판의
반 이상이 벚나무 재질이며 매연, 공해에도 강해 주로 가로수로 심는다고도 합니다.
(훈연재로 쓰면 우아한 향기가 나서 바비큐 목재로도 최상~!!)
참고로 벚꽃과 벚나무, 벚꽃나무 등 여러 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벚나무에 피는 꽃이 벚꽃!! 벚꽃이 피는 나무가 벚나무!!입니다.
벚나무 하면 일본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지요?
종종 벚꽃이 한국꽃인가, 일본꽃인가 하고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한국과 일본의 벚꽃 유전자 분석결과 벚꽃의 첫번째 유전자는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시작되었답니다!!
한때 제주벚나무가 일본의 재배종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여러 분석결과 동일종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의도 윤중로의 제주왕벚나무를 제외하고는 한국인들이 보고 즐기는 벚나무는 다 일본산 소메이요시노라고 하네요.
애초에 벚꽃놀이 자체가 일본인들의 익숙한 생활환경 조성을 위해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넘어온 문화라고 합니다.
벚꽃축제의 대표격인 진해시는 1962년 일재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소메이요시노를 다 베어버리고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우리나라 자생종 벚나무를 다시 심었으나 정작 제주왕벚나무의 한국산 품종이 아닌
일본의 재배종인 소메이요시노 2천여 그루를 해군과 공동으로 구입하며 심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90년대나 되어서야 일본의 소메이요시노와 제주벚나무가 별개의 종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를 몰랐던 당시로써는 좋은 취지에서 행한 것이라 여겨야 할 듯합니다.
이렇듯 벚꽃이 일본의 꽃이다, 잔재다!! 라는 인식이 박혀있어서 일까요.
2014년 2월 여의도 윤중로에서 60대 노인이 벚나무 6그루를 전기톱으로 베어버리는 사건도 있었다고 하네요.
이 노인은 경찰서에서 '독도 망언이나 우경화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으려 했다'
고 진술했다네요.
만개한 벚꽃과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벚꽃잎을 상상하며 설래였던 마음이 조금은 서글퍼지는 글이네요.
올 봄은 잊었던 역사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면서 새로운 마음으로 우리들만의 벚꽃 축제를 즐겨보는건 어떨까요.
이상 핫핫초코였습니다!!*^^*
(마지막 여담으로 시체가 묻힌 곳에 벚나무가 자라면 더 붉은 꽃이 자란다는 도시 전설도 있다고 합니다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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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 소리없는 살상무기 미세먼지
안녕하세요^^ 핫핫초코입니다.
오늘은 봄철 미세먼지의 원인과 예방법 을 알아볼까요!!
요근래 중국에서 불어오는 수많은 미세먼지와 기타 대기오염물질에
우리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사실, 미세먼지보다 미세중금속이라고 부르는게 맞지않나 싶을정도로
미세먼지에는 미세 중금속의 함유량이 높은데요.
단순한 자연풍화현상인 황사(현대에는 모래알갱이가 공장매연을 같이 쓸고와서 문제가 된 것)
와는 다르게 미세먼지는 공기중 매연입자, 황산화물, 수분등이 엉켜생긴
말하자면 금속 가루가 공기중에 떠다니는 것으로
그 위험성이 황사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어마무시합니다.
해변의 모래 지름이 70마이크로미터라면 미세먼지의 지름은 10마이크로미터 미만인데요
즉슨 모래보다 더 깊숙이 우리 몸속으로 침투가능하다는 얘기겠지요?
이렇게 몸속으로 들어온 미세먼지는 기관지를 거쳐 폐에 흡착,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며
2.5마이크로 미터 이하의 초초미세먼지는 혈관으로도 흡수되어 뇌졸증이나 심장질환을 일으킬수도 있다고 합니다.ㅠㅠ
이러한 미세먼지는 때로 두통을 유발하기도하는데요
혈관에 잘 녹는 초미세먼지의 농도에 따라 두통의 정도가 좌우되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 밖에도 여드름, 발진, 알러지, 안구, 지능저하, 치매, 우울증 등 뇌와 정신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각 개인의 미세먼지 대응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1. 마스크 끼기
현재 KF94, KF80, N95 등의 황사 마스크를 약국에서 약 1천원정도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 KF 숫자가 높을 수록 미세먼지를 더 잘 막아준다고 합니다.
2. 실내에서 공기청정기 이용하기
공기청정기는 더이상 사치품이 아닙니다,
H13등급 이상의 필터(아니고서는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있습니다)가 들어간 제품으로 구비해야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헬스장이나 독서실 선택시에 공기청정기 설치 유무를 따져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3. 외출 후 손, 발, 눈 등을 씻고 물을 자주 마시기
위와 같이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결론적으로 미세먼지농도가 높은 날에는 공기청정기가 설치된 실내에서 생활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합니다.
정부 또한 미세먼지 감소를 위해 교통량 줄이기, 화력발전소 발전량 줄이기, 인공강우, 초대형 공기청정기 제작 등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86%가 중국발 미세먼지인 현 시점에 정부의 대책은 별로 소용없어 보이네요 ㅠㅠ
손, 발 자주 씻기, 물 자주 마시기 등으로 봄철 미세먼지습격에 조금이라도 대응해 보아요
이상 핫핫초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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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화 운동(2부)
7.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 역시 군부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것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 동안 자국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개입하지 않았으나 1987년은 상황이 달랐다.
1987년 6월 당시 미소 냉전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완화되었고 미국의 이익이나 안전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88올림픽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한국의 정치상황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6월 16일 , 미국 국회에서 민주화 결의안이 제출,의결되었으며 6월 17일 CIA한국지부장 존스타인과 YS의 최측근 최형우와의 만남에서 최형우는 '이게 다 전두환의 후견인 노릇을 한 미국 탓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된다면 YS와 자신은 광화문 앞에서 분실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밖에도 한국의 여러 주요인사와 접촉한 CIA는 군부대가 출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이를 주한미국대사관 및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미 레이건 대통령 또한 즉시 한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군 부대 투입을 막고자 하였으나 주미 한국대사인 김경원이 '전두환의 성격상 특사를 보내면 오히려 성질만 돋구게 된다'고 말하며 다른 방식의 경고 메세지를 요청했다. 이에 백악관은 대통령 친서 전달로 단계를 낮췄다.
결국 전두환은 만일 정권이 평화적으로 이양될 경우 전두환의 방미를 주선하겠다는 레이건 친서와 12.12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측근이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8.독재정권의 항복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과 미국과의 관계에 위협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등 여러가지 상황으로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선택한다.
전두환은 이틀에 걸쳐 김영삼과 만나 협상을 했으나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등에 대한 김영상의 요구를 거부하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국국민당 총재 이만섭과의 회담에서 이만섭이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하는게 좋습니다."라고 말했고, 노태우 또한 직선제를 설득한다.
25일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고 6월 20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6월 항쟁은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을 끝으로 마무리를 짓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최대 인원이 모인 이한열의 장례식행렬에서 완전한 전두환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광화문 4가로 향하던 군중들은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뿔뿔히 흩어지고 6월 항쟁의 막이 내려진다.
9. 6월 항쟁의 결과
6월 항쟁이 끝난 후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확정되며 제 6공화국으로 개헌하게 된다.
6월 항쟁은 수십년에 걸친 군부 독재를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물러나게 한 사건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제 6공화국에의해 굴러가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이제까지의 운동과는 다르게 국민들이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정치적 열망만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데서 더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의 노래-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
아 우리들의 수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사랑 우리의 나라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손 맞잡은 우리 전지하는 우리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투쟁하는 우리 사랑하는 우리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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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과 준비과정
1904년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일전쟁(1904)이 발발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요충지로 쓰기 위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위해 제1차 한일협약(고문정치)을 맺는다. 결국 1905년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를 설치 하는 등 고종의 비준도 없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1905)을 체결한다. 고종은 무효화를 선언하고 언론과 각 의병활동이 일어났으나 결국 1907년 고종은 강제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차관정치)이 체결되며 군대의 해산과 함께 정미의병 또한 실패로 돌아간다.
1910년 일본에게 조선이 강제합병된 후,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1차 조선교육령으로 칼찬교원들이 등장하고 헌병경찰제도로 모든 집회와 단체활동은 일절 엄금되었다.
일본에 의해 실시된 토지조사사업은 표면적으로는 근대식 토지소유의 지향이었으나 실상은 국토의 40%이상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조선총독부는 이 토지를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넘기고 결국 이 토지는 싼값에 일본인들에게 팔린다. 그 결과 많은 농민들이 연주와 만해주로 떠나는 등 몰락하게 된다.
또한 회사령을 내려 민족자본을 억압하고 광업령,어업령,산업령을 선포하는 등 여러면에서 우리민족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이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를 선언하고 소련의 레닌 역시 제국주의의 반대 일환으로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등 전 세계 곳곳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그 와중 1919년 1월 고종의 사망에 이완용 독살설이 퍼지면서 반일감정은 극도로 격앙된다.
1918년 대종교계 인사(이승훈,한용훈,손병의 등)39명이 만주에서 무오대한독립선언을 발표하였고 1919년 2월에는 일본도쿄에서는 조선독립청년단 600여명이 2.8독립선언을 발표한다.
2. 민족대표 33인의 움직임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했으나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일으킬 경우 만약의 유혈사태를 대비하여 기생요릿집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 후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 일본경찰에 연행되었다.
3. 대한독립만세!
한편 이미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민중들은 민족대표들의 갑작스런 장소변경에 당황했다. 학생들은 그들이 태화관에 틀어박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항의했으나 탑골공원에서의 낭독은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듣게 된다.
이에 학생그룹은 그들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낸뒤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운동을 벌였고 일반 민중들이 가세하여 시위의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보신각을 거쳐 각 숭례문, 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헌병은 이들을 무력진압하려 하였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저녁6시 자진해산했다. 다음날인 3월2일 조선총독부는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과 참가자들을 찾아내 연행하기 시작했고 그날 하루만 무려 1만여명이 넘게 체포되었다. 같은 시각 평양, 의주, 선천, 안주,원산,진남포 등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고 3월2일은 평양까지 퍼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강압적인 진압으로 대량학살사건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기도 했다(ex,제암리 학살사건)
5. 결과와 영향
예상치 못한 우리 민중들의 저항에 적잖이 놀란 일본은 기존의 강압적 무력통치 방식을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이후 일본의 정가에서는 조선에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려 할때마다 '3.1운동을 잊었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3.1운동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 스스로가 주도한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3.1운동은 여러매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독립운동, 대만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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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운동(1894)의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198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이다.
초기에는 전주성을 함락하는 등 우세했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되고 만다.
처음 시작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이었고 그 진행과정에서 점차 정치적운동으로 성장, 민란과 결합하여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내걸은 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척양척왜: 일본과 서양을 배척)
초기 민란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단순하게 농민들의 궐기운동과 내전으로 그칠 것으로 여겨졌으나 조선조정의 청나라군대 요청. 청과 일본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으로 일본군까지 주둔하게 된 결과 대립관계에 있던 양국의 관계는 청일전쟁(1894~1895)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써 동학 농민운동은 두 양대 세력의 한반도 주둔명분이 되었고 청과 일본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은 조선과 사대관계를 끊는 계기가 되고 일본에게는 본격적인 한반도 침략의 계기가 된다.
(*텐진조약: 청.일 사이에 맺은 조약, 조선내에서 청과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
(*시모노세키조약 : 청.일 전쟁, 일본의 승리, 전후 처리를 위해 청과 일이 맺은 조약)
2. 동학농민운동의 과정
▶1893 보은집회(충청도) : 동학 제 1대 교주인 최재우의 '교조신원운동
▶탐관오리 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사건으로 불만 고조->'고부농민봉기(1894.1)' 발발
▶정부가 봉기수습위해 안핵사 이용태 파견->동학군 체포 및 살해->민란 더욱 확대
▶1차 동학농민봉기(전봉준,김개남,손화중) : 백산봉기 -> 황토현전투 동학군의 승리 ->전주성 무혈점령(1894.4.27)
3. 외국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자 정부는 전주성 탈환을 위해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극의 역사를 초래할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고종이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파견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 김병시가 청과 일사이에 맺은 텐진조약에 의해 일본의 진입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나 고종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5월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고 뒤이어 6일 일본군까지 제물포에 상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에 놀란 조정은 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외국군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 텐진조약에 의거 조선의 변란이 진정되면 즉시 두 나라 모두 철수한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군 또한 상황이 여러모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해 조정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발표한다. 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하고 자발적 개혁을 명분으로 정부는 교정청, 농민들은 민생안정을 위해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자치 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한다.
◈동학군의 폐정개혁 12개조
▶탐관오리의 처벌
▶신분제도 폐지(평등강조)
▶외세와 내통하는 자 처벌
▶토지개혁(토지의 균등분배) 등 주장
4. 2차 봉기
청과 일본군에게 민란이 수습되었으니 물러날것을 권고했으나 갑신정변(1884)이후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본은 조선의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며 철군요구를 듣지 않았다. 러시아와 영국 등 여러 유럽국가들의 중재에도 불구, 심지어 동학난은 다 끝난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이니 공동철수하자는 청군의 제안까지도 무시해버린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과의 모든 조약 폐기,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그 와중에 김홍집(온건 개화파-친일)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1차, 1894)을 진행했고 전장이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에 분노한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농민봉기를 일으킨다.
◈갑오개혁(1984)의 내용
▶정치 -연호를 '개국'으로 바꿈(청의 종주권 부인), 과거제도 폐지, 6조->8아문으로 개정(왕권약화)
▶경제 -재정일원화(탁지아문), 은본위 화폐, 조세의 금납호, 도량형 통일 등
▶사회 -신분제도 폐지, 고문,연좌제 금지, 과부재혼 허용 등
5. 패퇴
일본의 이러한 행태에 화가난 동학군은 당시 이념차이로 나눠졌던 북접(손병희)과 남접(전봉준)이 하나로 모여 한성탈환을 목적으로 논산에서 결집한다. 이때 일본군의 주도하에 정부군과 일본군 또한 농학군을 진압할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동학군이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사들로 조직된 일본군을 이기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11월 27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며 동학군은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6. 의의
전주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1984)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 볼 수 있으며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운 근대성을 지향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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